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윤설희 전 KB생명보험 부사장

지난해 말 자녀를 결혼시켰다. 아니, 이 말은 사실과 다른 표현이다. 자녀가 결혼을 했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우리네와 달리 그들은 스스로 파트너를 찾고 결혼을 결정했다.

혼인 날짜와 결혼식 프로세스, 모든 것이 자녀의 디자인에 따라 결정되었고 부모인 우리는 결정된 것을 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삼십 대 중후반이 되어 결혼을 하는 자녀들은 이미 완전히 성인들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이십 대에 결혼한 우리네가 거의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존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혼주=혼인의 주인’의 의미도 바뀔 수밖에 없다. 이제 혼주는 부모가 아닌 당사자들이다.

날을 잡은 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다소의 의무감이 있었으나 결국 우리가 한 것은 없었다. 결혼식 당일 두세 시간 일찍 식장에 도착해 화장을 받는 것뿐이었다.

부모로서 의무가 없는 대신 권리(?)도 없었다.

초대할 친척과 부모의 하객 숫자도 그들이 정해 알려주었다. 덕분에 전직 회사 알림방에 청첩장과 계좌번호를 알리지 않겠다는 나의 평소 작은 신념을 지킬 수 있었다.

내게 주어진 티켓은 딱 5장. 딸의 성장과정을 잘 알고 있는 절친들만 초대했다.

그러나 식장에 가보니 작은 결혼식은 아니었다. 식장은 당사자들의 친구와 동료로 붐볐다.

완벽하게 화장을 하고 우아하게 앉아 찾아오는 하객들을 맞이하는 신부대기실도 없었다. 신랑 신부는 홀 이곳저곳을 다니며 지인들의 축하를 받고 사진을 찍고 담소를 나누었다.

오히려 부모들은 뻘쭘하게 입구에 서서 드문드문 오는 친인척과 친구들을 맞이했다.

초반의 낯설고 허전한 감정은 갈수록 편안함으로 바뀌었다. 그렇지! 결혼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맞지! 우리는 중요한 게스트일 뿐이지.

예단, 혼수, 폐백은 입에 오르내리지도 않았고 식장에서는 한복 대신 양복을 입으라는 자녀의 요청이 있었다. 기뻤다. 오래전 나의 혼인 때 딱 한 번 입었던 어색한 한복보다는 직장 다닐 때 입던 양복이 편했다. 돈 굳었다.

내게 주어진 유일한 의무는 대표로 축사를 하는 것이었다. 주어진 시간은 4분.

나의 유일한 고민거리였다.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열해 보니 꽤 많았다. 4분은커녕 10분은 걸리겠다.

고민하다 챗GPT에게 물어보았다.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검증차원에서 바드에게도 물어보았다. 바드 역시 부부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솔직한 대화임을 강조하는 심플한 축사를 작성해 주었다. 축사의 길이는 5분에서 7분 사이가 적당하다는 충고까지 해주었다.

AI 덕분에 살짝 살을 붙여 재미있고 군더더기 없는 축사를 할 수 있었다.

땡큐! AI!

1부 예식을 이십여 분 만에 마치고 2부는 그야말로 파티였다. 당사자들의 친구들이 나와서 추억하고 증언하고 노래도 하고 낭독했다.

신랑신부가 직접 사회를 본 2부 마지막 순서는 정성스레 준비한 선물을 나누는 ‘러키 드로우’였다. 즐거움의 환호와 아쉬움의 탄식이 여기저기 터진다.

참석한 몇 안 되는 지인들은 처음 경험하는 결혼문화에 놀라워했고 한편으로 재밌어했다.

AI시대 결혼식은 정답이 없는 것 같다. 그저 혼인의 주인공들이 머리를 맞대고 자유롭게 기획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결혼식이 있었으니 저기서는 또 다른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지 않을까? AI시대는 백인백색의 시대인가 보다.

비교적 견고하게 전통을 지켰던 결혼문화가 이렇게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이 변화를 AI의 영향으로 볼만한 뚜렷한 근거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AI시대에는 그간 당연시되었던 기준들이 허물어지고 각자의 색깔과 취향으로 백가지 만 가지의 모습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슈퍼 울트라 초개인화 시대다!

나라 살림을 이끌어 가면서 정해진 기준하에 움직여 왔던 공무원들에게 이런 만 가지 모습의 시대를 맞아 요구되는 변화는 무엇일까?

수많은 예외에 대한 유연한 허용일까? 아니면 수많은 개별성을 관통하는 새로운 핵심을 세우는 것일까?

분명한 것은 과거 사례와 지식이 이제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조건 배우는 learning의 시대를 살아왔던 부모세대는, 앞으로는 배운 것을 비우는 unlearning과, 다시 학습하는 relearning에 적응해야 판이 바뀌는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시대의 적응 방법도 한번 AI에게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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